우지파동이후 팜유로 대세가 바뀐 라면시장에서 다시 "공업용(?)우지"로 상품을 출시한 삼양라면 
 
[시사의창=김세전기자] 1989년 우지파동 당시 검찰총장은 김기춘이었다. 그의 특별지시를 받은 검찰이 삼양식품을 대대적으로 수사해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아갔다.
1989년 11월, 한 장의 의문의 투서가 검찰에 날아들었다. 당시 라면업계 시장점유율 31%로 독보적 1위를 달리던 삼양식품은 이 투서를 계기로 한 검찰총장의 특별지시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시 식품학자들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사를 검찰이 무리하게 한 것에 대해, 그것도 사장 등 10명을 전격 구속 수사한 것에 대해 다양한 억측을 내놓고 있다. 검찰이 왜 수사하게 됐는지에 대해 30년 가까이 수사 당사자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공안검사 김기춘. 1972년 유신헌법 제정에 핵심적으로 관여했고, 1975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11·22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유신 독재 시절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공안검사'로 악명을 떨쳤다.
1989년 3월 황석영과 문익환 목사의 연이은 방북 이후, 김기춘의 검찰은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섰다. 이재오, 고은, 리영희 등이 잡혀 들어갔고 전민련 관계자들도 줄줄이 구속됐다.
그런 김기춘이 1989년 11월, 우지파동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공안 사건 일색이던 검찰에 '민생 치안'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쇼'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30년이 넘도록 수사 당사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문성 제로, 언론플레이는 만점
검찰은 실제 미생물·화학적·물리적 위해인자에 대한 분석과 위해평가를 실시하지 않고 인체 위해성이 입증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식품공전 위반 사안을 '공업용 쇠기름'이라는 프레임으로 포장해 경제적·사회적 손실을 지나치게 유발했다.
미국 우지협회는 등급을 16급까지 구분했는데, 삼양식품은 2~3등급 정제 우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식용으로 분류되는 등급이었지만, 검찰은 1등급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공업용'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은 수사 결과 발표 때 '공업용 쇠기름이 인체에 유해한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파문은 엄청났다. 검찰 스스로 유해성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공업용 우지'라는 프레임은 이미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다.
언론의 처형식 보도
언론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과학적 근거 없이 '공업용 우지'라고 표현하면서 삼양식품을 부도덕한 기업으로 몰아세웠다.
언론은 '공업용 우지'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비누와 윤활유 원료를 라면에 넣었다"는 식의 자극적 제목이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검찰의 발표 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우지가 무해하여 식용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지만. 발표 후에도 가게에서 라면 판매가 사실상 중단될 정도로 판매량이 급감했고, 동남아에서 라면을 비롯한 한국산 인스턴트식품을 기피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 무해 판정을 검찰 발표만큼 크게 다루지 않았다. 이미 '공업용 우지 라면'이라는 낙인은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후였다.
8년 만의 무죄,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1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95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로 뒤집혔고, 1997년 대법원에서도 무죄로 결론나 사건은 완전 종결되었다. 
하지만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삼양식품은 100만 박스 이상의 라면을 폐기 처분하고, 3,000여명의 직원 중 1,000여명이 이직하는 창사 이래 최대의 수난을 겪었다. 1988년 시장점유율이 압도적 1위로 31%였던 것이 이 사건 직후 10%로 급락하였고 1990년대 초까지 수백억원의 적자에 허덕였다.
문제의 우지를 사용해 마가린과 쇼트닝을 제조하던 서울하인즈와 삼립유지는 롯데삼강에게 시장을 양보하였고 부산유지는 사건 직후 부도를 내고 회사를 해산하게 되었다.
승승장구,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김기춘의 행보다. 무고한 기업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간 그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1991년 법무부 장관에 올랐고,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을 주도하며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이후 국회의원 3선, KBO 총재를 거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소추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기춘대원군', '왕실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어 2017년 1월 구속됐다.
흥미로운 점은 김기춘이 2008~2013년, 그리고 2015~2016년 농심의 비상임 법률고문으로 재직했다는 사실이다. 삼양식품의 라이벌인 농심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이다.
검찰·언론개혁은 필요한가?
우지파동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전문성 없는 검찰의 정치적 수사, 검증 없이 권력의 발표를 받아쓰기만 하는 언론의 무책임, 그리고 무죄가 밝혀진 후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이 모든 것이 한 기업과 수천 명의 노동자, 그리고 산업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가해자는 승승장구했고, 피해자는 30년간 나락을 헤맸다.당시 매출 4,000억원의 라면시장이 전문적인 지식 없는 검찰의 일방적 발표로 얼어붙게 되었다. 한 산업 전체가 검찰총장 한 사람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김기춘은 1970년대 간첩 조작, 1989년 우지파동,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1992년 초원복집 사건, 2004년 노무현 탄핵,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까지...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항상 그가 있었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으로 화려한 부활했지만, 그 성공은 김기춘과 그의 검찰, 그리고 언론의 잘못을 면죄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36년 전 그들이 빼앗아간 '잃어버린 30년'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기자의 눈] 2025년 현재도 여전히 '의혹 제기'만 하고 검증은 뒷전인 일부 언론, 수사 중인 사건을 마치 확정된 것처럼 발표하는 검찰의 관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지파동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김기춘이라는 인물의 40년 경력이 증명하듯, 개혁 없는 권력은 계속해서 무고한 이들을 짓밟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참고] 우지파동과 김기춘 연표
1989년 11월: 검찰총장 김기춘 특별지시로 삼양식품 등 5개사 대표 구속
1989년 11월 6일: 보건사회부, 라면 무해 판정
1989년 11월 28일: 구속자 전원 석방
1994년: 1심 일부 유죄
1995년: 항소심 무죄
1997년: 대법원 최종 무죄 확정
피해 규모: 시장점유율 31%→10% 급락, 직원 1/3 이직, 수천억원대의 적자
김기춘 그 후: 법무부 장관(1991) → 국회의원 3선 → 대통령비서실장(2013) → 블랙리스트로 구속(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