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한 세기 동안 이어온 고려인 한글문학의 흐름을 되돌아보는 ‘한글문학 기획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고려인들이 남긴 시와 소설, 희곡, 문예지, 신문 등을 한자리에 모아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언어의 불씨와 정신의 혼을 조명한다.
*시인·소설가·극작가 김두칠(1914~1983)- 고려인문학 100년의 불씨가 된 이름/ 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그 중심에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한 이름이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하며 고려인문학의 초석을 세운 김두칠(1914~1983)-그의 이름은 기록보다 기억으로, 언어보다 침묵으로 남은 예술가의 이름이다.
1937년, 스탈린의 명령 한 줄에 수십만 명의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끝없는 철길 위에서도 누군가는 종이 한 장을 품었다. 시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언어는 잊혀졌지만, 그들의 시는 잊혀지지 않았다.
그 이름 중 하나가 김두칠이었다. 그는 낯선 중앙아시아 황무지에서도 한글을 버리지 않았다. 모국어의 숨결로 시를 쓰고, 극과 소설로 공동체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에게 문학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이자 기억의 증언이었다.
김두칠은 시로 마음을 노래했고, 소설로 시대를 서술했으며, 희곡으로 망명지의 무대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은 기록으로 모두 남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언어의 흔적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바람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의 부재 자체가 곧 그의 시였고, 그의 침묵이 곧 그의 문학이었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강태수는 「밭 갈던 아씨에게」, 「나의 가르노」를 통해 유배된 민족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를 썼다.
전동혁은 서사시 「박 령감」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삶을 ‘혁명’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체제 속 인간의 존엄을 증언했다.
그러나 김두칠의 문학은 그들과 또 달랐다. 그는 체제의 언어가 아닌 침묵의 언어로 저항했다. 그의 작품은 사라졌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잊혀짐과 싸운 존재의 증거’로 남았다. 그의 시는 잿빛 초원 위, 홀로 바람에 말을 걸던 이의 숨소리처럼 들리지 않아도 가슴 깊이 전해지는 진동이었다.
강태수의 시가 ‘고향의 회상’이라면, 전동혁의 시는 ‘역사의 증언’이었다. 그리고 김두칠의 문학은 그 사이의 고요-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전히 말을 믿은 사람의 기록이었다.
그는 시를 통해 한글을 붙잡았고, 소설로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기록했으며, 극을 통해 공동체의 숨결을 무대 위에 되살렸다. 그의 언어는 오늘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다시 피어나는 한글문학의 뿌리가 되었다.
고려인문학은 화려한 문단이 아니라, 생존의 자리에서 태어난 문학이다. 그들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써 내려간 언어의 기도였다.
김두칠의 이름이 오늘 다시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잊혀지는 것도 운명이지만, 기억하려는 마음은 역사가 된다.”
언젠가 김두칠의 시, 혹은 그의 잃어버린 희곡 한 편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학의 복원이 아니라 언어의 생존이며 정체성의 귀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비로소 ‘바람이 글이 되던 시절’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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