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연히도 8월 말부터 9월 중순에 걸쳐 3개의 개인전을 치르게 되었다. 하나는 강원도 정선에서, 다른 2개는 삼청동의 미술관과 을지로 세운상가에 있는 실험적 전시 공간이었다. 우연히 이루어진 전시였지만 평소에 해두었던 작품이 공간을 채우기에는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3개의 개인전을 용기 내었다. 전시할 때마다 첫 번째 개인전을 했던 40여 년 전의 봄이 생각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갤러리에 설치되어져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그 첫 번째의 개인전을 생각해 내었다. 첫 번째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초심이라는 것일 텐데 처음이라는 것의 설렘과 각오,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정서 때문일까?

<스스로 상처낸> 이두섭


[시사의창 2025년 10월호=이두섭 작가] 올해는 우연히도 8월 말부터 9월 중순에 걸쳐 3개의 개인전을 치르게 되었다. 하나는 강원도 정선에서, 다른 2개는 삼청동의 미술관과 을지로 세운상가에 있는 실험적 전시 공간이었다. 우연히 이루어진 전시였지만 평소에 해두었던 작품이 공간을 채우기에는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3개의 개인전을 용기 내었다. 전시할 때마다 첫 번째 개인전을 했던 40여 년 전의 봄이 생각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갤러리에 설치되어져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그 첫 번째의 개인전을 생각해 내었다. 첫 번째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초심이라는 것일 텐데 처음이라는 것의 설렘과 각오,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정서 때문일까?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그래서 화업의 결과를 생각해 내고 그것으로 다음의 작업에 대해 예측하고 작은 목표를 정하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와보라 하지만 실은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해서 전시 때마다 연락하지 못하고 어쩌다가 한 번씩 함께 밥 먹는 시간을 가지려고 기별한다. 그렇게 전시 중에 만나는 벗들과의 소중한 시간은 내게 참으로 각별하다. 늘 격려하는 벗들을 잃지 않으려고 그림 그리는 일에 더욱 열심의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나의 작품을 사랑해주는 고마움에 대한 책임이랄까.
안내대에 앉아서 관람객이 뜸한 시간에는 내 그림을 망연히 쳐다본다.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 생각하며 작업을 객관화시켜 본다. 스스로 세계에 있다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착각으로 인해 공허한 목소리를 내는 향기 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기에 객관화는 중요한 자기 검증이다. 내 작업을 판단해볼 때 그림이라 하기에는 묘사되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화가가 아니라고 단언하곤 한다. 작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한 상황이 아닐까. 대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 컨트롤 하는 행위를 통해 스트레스를 받거나 조심하는 것이 아닌 물감으로 무작위로 칠을 하는 상황이고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작업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시간의 누적이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테크닉을 탈피하고 감각만을 존재시키는 것, 그 계산되지 않는 감각으로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여는 그림이 되지 않을까.

<완벽한 시간> 이두섭


전시 시작 둘째 날에 낯선 전화가 왔다. 쇼 윈도우 갤러리로 운영되는 동시에 전시하는 세운 아트 스페이스에서 지나는 사람이 작품을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구매하겠다는 연락이었다. 어찌 보면 그냥 색칠에 불과한 그림 을 구매하겠다는 의견이 정말 고마워서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가격을 말해 달라해서 가격을 제시하자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느껴졌고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전화가 끊어졌다. 실은 그림을 판매한다는 것은 자본사회에서 필요한 거래가 맞다. 그래서 작업행위가 지속해서 유지되고 문화가 더욱더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일 테니. 응원은 참으로 용기를 주는 중요한 의미이다.

내가 개인전을 하고 있는 미술관 마당에는 소나무가 심겨 있다. 하나는 정원 중앙, 미술관 출입구에 가지를 걸치고 있는데, 곧바로 하늘을 향해 자라는 형태가 아니고 기울어져 있어 다른 소나무와 모양이 달라 특이하고 멋져 보이는 소나무이다. 미술관 안내대에 앉아서 바라볼 수 있는 소나무에 자꾸 눈길이 간다. 소나무 특유의 껍질의 모양과 늘어져 있는 가지는 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일주일 내내 틈나면 여러 각도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해보았다. 소나무는 무심이 서 있고 나는 안달이 나서 이리저리 주변을 맴돌며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멋진 대상을 사랑하는 방법일까.

전시 마지막 날 주말이라 그런지 관람객들이 많이 방문하였다. 그중에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긋한 나이들의 중장년 3명이었다. 그들은 작품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였다. 문화 탐방하는 분들 같았다. 몇 명이 무리 지어 문화 행사를 같이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분들도 그런 관람객인 것 같았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형태가 없이 색과 선으로만 존재하는 추상 회화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번갈아 많이 물어봤다. 하나하나씩 알아듣게 설명한 후 수고가 많다는 인사를 받았는데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되냐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수많은 전시를 하면서 처음 듣는 당황스러운 질문. 즉 그림이 팔려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는지 걱정이라 하였다.

<MISTY> 이두섭


순간, 착잡하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깊숙한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걱정해주는 이름다운 배려라는 생각에 전혀 무례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래, 나는 무슨 마음으로 이런 그림을 그릴까. 무심하게 그려내어 형태와 재현이라는 예술적 재능과 관심을 무시한 그림. 누가 이 그림을 사들일까.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대하여 더 깊은 지점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팔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누군가와 깊이 만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만약 제 그림 속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이유로 그림을 사들이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제 예술이 가진 힘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술과 생계, 존재와 재현, 무심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지점에 서 있는 이번 전시는 그 사람들의 질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속 반복되는 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되묻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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