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포레스트’ [출처_www.dhdaily.co.kr]


[시사의창 2025년 10월호=김향란 칼럼니스트]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새로운 철학
최근 사회 전반에서 주목받는 키워드 아보하(Aboha, 트렌드코리아 2025,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아주 보통의 하루’를 의미한다. 특별한 자극과 화려함보다, 일상 속의 작은 루틴과 평범한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만연한 시대에, 사람들은 이제 ‘일상의 안정성’과 ‘소소한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2018년 소확행이라는 키워드 이후에 저자도 가장 유의미한 키워드라고 자부할 만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키워드임에는 분명하다. 이를 컬러인문학의 시각에서 보면, 아보하는 색을 통해 더욱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겠다. 매일 반복되는 공간과 물건, 계절의 변화 속에 담긴 색들은 우리의 감정을 조율하고, 평범한 하루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일상 속 컬러 경험의 사례를 들어보자.

커피의 갈색, 위로의 색
아침 출근길에 손에 드는 종이컵 속 커피의 브라운(brown)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브라운은 안정감, 따뜻함, 신뢰를 상징하며, 바쁜 하루의 시작에 작은 위안을 건넨다. 실제로 스타벅스가 브랜드 컬러로 짙은 브라운과 그린을 사용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소비자는 커피의 색에서 ‘루틴의 안정감’을 경험하고, 이는 아보하적 일상의 상징이 된다.

집 안의 초록, 치유의 색
팬데믹 이후 집 안에 화분을 두는 플랜테리어(Plant + Interior)가 유행했다. 초록 식물이 주는 작은 변화는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심리적 치유 효과를 준다. 초록은 안정, 회복, 균형의 색으로서, 하루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아보하가 추구하는 ‘평범하지만 치유적인 하루’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대표적 사례다.

저녁 하늘의 남색, 하루의 마무리
퇴근길 하늘이 검푸르게 물드는 네이비 블루(navy blue)는 하루의 끝을 알리는 색이다. 블루는 신뢰, 평온, 사색을 상징한다. 특히 피카소의 청색시대 작품처럼 블루는 고독과 성찰의 정서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는 아보하적 일상 속에서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색의 언어로 충분하다.
예술 속의 아보하의 색은 어떠한가? 모네의 수련과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는 자택 정원의 연못을 그린 〈수련(Nymphéas)〉 연작을 수백 점 남겼다. 같은 연못, 같은 수련이지만 빛과 계절,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반복되는 장면 속 색의 변화는 ‘아주 보통의 하루’가 결코 단조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보하의 철학이 그대로 투영된 예술적 사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는 화려한 사건이 아닌 시골에서의 일상과 음식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따뜻한 베이지빛 부엌, 계절마다 변하는 들판의 색,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의 컬러는 아보하적 감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작은 색의 반복이 주는 정서적 안정은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브랜드와 디자인 속 아보하는 어떤 의미로 우리와 함께 할까?
일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MUJI)은 화려한 로고나 장식 대신, 베이지·화이트·그레이 등 무채색 계열을 중심으로 제품을 디자인한다. 몇 해 전 일본 무인양품에 들러 그들의 철학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영상과 홍보용 매뉴얼을 보았다. 일상 속에서 녹아들 수 있도록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의 미학’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와닿았다. 아보하적 라이프스타일과 정확히 맞닿아 있으며, 색을 통해 ‘보통의 하루가 곧 풍요로움’으로 작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배달의 민족의 ‘배민그린’이라는 컬러를 강조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리프레시했다. 눈에 자극적인 원색 대신, 친근하고 부드러운 민트 계열의 색을 채택함으로써 ‘일상 속 무해함’과 ‘편안한 소비 경험’을 전달한다. 김봉진 대표의 그다운 ESG로 기존에 해오던 친환경 활동에 이름을 붙여 브랜딩하였다. 자극보다는 신선함으로 강함보다는 약함의 반복이 더 강력하게 소비자의 마음을 편하게 움직여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사례다.
아보하적 삶에서 색은 단순히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뇌와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신호로 작동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색 경험은 뇌에 안정 신호를 전달한다. 매일 사용하는 머그컵의 색이나 침실 벽지의 톤처럼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색은 정서적 안정감을 강화한다.
이 현상은 여러 학문적 근거에서 설명되는데, 첫째, 예측 처리 이론(Predictive Processing Theory)에 따르면 뇌는 환경을 예측하고 실제 입력과 비교하며 오차를 줄여나가는 체계다(Friston, 2010). 익숙한 색은 예측 오차가 거의 없어 뇌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둘째, 환경심리학(Environmental Psychology) 연구에서도 일관되고 반복되는 색채는 공간의 질서감을 높여 불안을 낮추는 효과가 있음이 확인되었다(Kaplan & Kaplan, 1989). 셋째,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색이 반복적으로 긍정적 경험과 결합되면 그 색 자체가 안정의 신호로 작용한다(Bellizzi & Hite, 1992)는 것이다.
즉, 일상에서 반복되는 색의 경험은 단순히 ‘눈에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뇌의 예측 체계를 안정시키고 정서적 평온을 유도하는 심리학적 치유 코드라 할 수 있다. 결국 아보하적 삶은 색의 일관성과 반복을 통해 더욱 선명해지고, 그 울림은 일상 속에서 우리를 평온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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